[1박2일을 보고] 20년 후에 내아이는 어떤 시골의 추억을 떠올릴까? 홍콩/여행/육아/초딩아들 키우기2009. 5. 4. 11:59
방학, 그리고 시골의 추억 |
방학이면 탐구생활과 일기, 필기도구, 옷가지를 가방에 넣고, 나와 동생은 시골로 보내졌다. 놀이터는 따로 없지만, 온통 초록빛이 아름다운 시골속에서, 우리는 숙제따위는 잊어버리고 천방지축 뛰놀았다. (덕분에 방학 마지막 주에는 집에 돌아와 밀린 탐구생활과 일기를 쓰느라 고생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여름이면 소에게 풀을 먹이고, 개를 데리고 동산에 오르고, 빨간 고추잠자리를 잠겠다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서 최면을 걸었다. 잠자리채를 들고 나비와 잠자리, 곤충을 잡아 아빠가 마련해준 포르말린이 든 유리병에 담아서 곤충채집도 했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집 옆에 흐르는 계곡물에 발 담구고, 바위를 들쳐올리며 가재를 잡았다 놓아주기도 했다. 그러다 텃밭에서 일하는 외할머니에게 뛰어가면, 할머니는 일을 멈추시고 수박 한덩이와 참외 몇개를 따서 집앞 우물의 차가운 물속에 담가두셨다가 주시곤 했다.
겨울이면 쌀푸대 한장들고 집 옆에 있는 동산에 뛰어 올라 천연 눈썰매를 타고, 논위에 생긴 얼음판에서 할아버지가 나무와 칼날을 이용해 만들어주신 썰매를 탔다. 부엌 아궁이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도 재밌는 놀이였다. 추워서 세수하기 싫은 날이면 할머니가 솥에서 따뜻하게 끓인 물을 세수대야에 담아서 수건과 비누와 함께 방까지 가져다 주셨다. 밤이면 푸세식 화장실이 무서울까 호강을 방앞 마루에 놓아주셨다. 5일장에 따라가면, 우리를 위해서 소세지와 김, 계란을 특별히 더 사고 쌈지돈을 풀어 강냉이와 호박엿을 쥐어주곤 하셨다.
시골집은 지은지 100년쯤 되었다고 했다. 나무와 흙,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진 소박한 집이었는데, 나무살과 창호지로 만든 문에 구멍을 내서 할머니께 꾸중을 듣기도 했다. 아랫목쪽으로 동그랗고 까만 문고리가 달린 문을 열고 올라가면 보물창고 같은 다락이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과 먼지로 가득 채워진 그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잠이 들어버려 집안 사람들이 다 나를 찾아나서게도 만들었다.
시골은 생활하기에는 불편했다. 푸세식 화장실은 냄새도 고약했지만, 빠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주었고, 가로등도 없어 형광등을 꺼고 나면 완전히 캄캄해지는 밤이면 선명하게 들리는 괘종시계의 째깍째깍 초침소리는 어린 나를 잠못들게 했다. 여름이면 온몸을 물파스로 도배를 하게 만드는 미운 모기들. 제대로 된 슈퍼마켓이 없어서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은 아직도 가끔 꿈에 나타날 정도로 그립고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 아이에게도 시골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
달팽군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도시에 있다. 홍콩에서 생활하다 방학때 1-2주 정도 한국에 들어가면, 양가 모두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고 있어 '시골'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게 늘 아쉬워서 한국에 가면 가능한 시간을 내서 시골에 데리고 가려고 한다. 가장 시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외증조할머니댁이나 돼지축사를 하고 있는 막내할아버지댁에 갔을때 정도일까.
달팽맘의 외가댁은 10년전쯤 예전에 살던 오래된 집은 창고로만 쓰고, 300m쯤 떨어진 도로변에 단층주택을 지어서 이사했다. 몸이 불편하신 두분을 생각하면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어린 시절의 시골의 모습을 떠올리는 내게는 살짝 아쉽다.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화된 예전 외가집을 돌아보면 마음 한켠이 시리다. 그집에는 농사일에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을 가진 건강하고 정정하신 외할머니의 모습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집밖으로 거동하시기 힘들 정도로 나이든 외할머니의 굽은 손과 등마냥 옛집은 허물어져 가고 있다. 달팽군은 너무 나이가 많으신 외증조할머니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년에 한번 찾아 뵈면 데면데면하고 어색해한다. 그래서 외증조할머니댁에 가면 고등학생인 이모만 따라다니면서 논다. 달팽군을 사로잡는 건 외가댁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맛있는 한우전문점뿐..ㅠ,ㅠ
그에 비하면 막내 할아버지댁은 재미있는 일이 많다. 천마리도 넘는 돼지가 꿀꿀거리고 있는 축사는 냄새는 나지만, 새끼돼지도 볼 수 있고 트랙터를 놀이기구처럼 타고 놀 수도 있다. 여름에 가야 딸기도 먹고, 직접 농사일도 도우면서 다양한 체험을 할텐데, 요 몇년간은 겨울에만 한국 갈 기회가 있어서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외가댁, 그리고 시골은... |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하고 그리워지는 마음의 고향.
자연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늘 같은 모습인 그런 곳.
철없이 마냥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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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도 1박 2일을 보고 시골의 모습이 그리웠습니다. 1박2일 컨텐츠도 참 잘 잡는거 같네요.
오늘은 음식이 아니라 마침 점심 시간인데.. 덜 배고프네요.^^
2시간만 기다리세요. 맛있는 거 올릴 겁니다. ㅎㅎㅎ
저도 시골이 없어서 그런 추억은 별로 없는데.. 처가 집이 바닷가라서 참 좋더군요.
역시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이런 추억에 잠길수 있는곳이 한곳쯤 있는것이 좋아요^^
오.. 바닷가 출신~ 저도 아내가 인천에서 자랐어요. ^^
시골이 있는 애들은 좋겠네요..ㅋ
전 생긴건 시골촌놈처럼 생겼는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서울촌놈입니다..ㅋ
그러게요.. 시골이 있다는 거 참 좋은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아이들이 적은 것 같아요.
잠시나마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네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어린시절의 순수함을 떠올리며, 어린이날 휴일 잘 보내세요. 홍콩은 평일이라 한국이 부럽습니다. ㅎㅎ
외가도 없고 도시에서만 자란 화니가 갑자기 너무 불쌍해집니다 ㅠㅠ
그래서일까요...아주 오래전에 봤던 '1박2일'은 오래고 제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었던거 같아요 ^^
먼 곳에서 타향살이 하다보면 고향이 가끔 그리워집니다. 저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서 고향이 시골은 아닙니다만 어린 시절 아버님 손 잡고 다니던 할아버지가 사시던 시골에 놀러갔던 게 기억에 많이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