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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가족이 만난 사람들] 홍콩한인회 잡지 교민소식에 연재했던 인터뷰 기사입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 연구소의 서광선 박사님을 만나다
04-04 12:59 | HIT : 201

글 원정아


서울시내에서는 대학이 흔해서, "이대"역, "외대앞"역 등 대학이름이 등장하는 역이 몇 곳이나 있지만, 처음 KCR에서 "대학"역을 봤을 때는 좀 갸우뚱 했다.  이름도 없이 그냥 대학 역이네.  무슨 대학이길래 이름도 안 붙이고 그저 "대학"이란 보통 명사만 붙여 놨을까? 하고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나중에야 그곳이 그 유명한 중문대학이 있는 역이란 걸 알았다.

처음 가본 중문대학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 바람이 불어오는 자연이 가까운, 학문의 전당이라는 느낌이 들고 아늑했다. 아직 직장생활을 그다지 오래 한 것도 아니면서, 공부하는 사람들만 보면 참 부럽다.  서광선 박사님을 뵈니 더 부러웠다.  미리 알고 간 사전정보에 의하면 고희(古稀)를 훌쩍 넘기신 노교수님으로만 생각했는데, 목소리며 말씀하시고, 생각하시는 것에서는 전혀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성성한 백발에서 혈륜이 느껴질 뿐이었다.



홍콩으로


교수님과 홍콩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01년 8월이라고 한다.  1996년 30여년 가까이교직생활을 했던 이화여대에서 65세의 나이로 은퇴를 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모교 유니온 신학대학에 초빙교수로 갔다가 뉴저지, 드류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기독교 고등교육 재단(United Board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Asia)에서 이사로도 활동을 하셨다고 한다.  이 단체는 1922년 중국의 13개 기독교 대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는데,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에서 철수해 미국에 본부를 두고 중국 외의 아시아 지역의 기독교 대학을 지원하는 일을 계속 해왔다.  2000년까지는 쭉 뉴욕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을 했으나, 시대가 변했으므로 단체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아시아에 사무실을 두기로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 서교수님이 일하고 계신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 연구소(Asian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stitute)이다. 아시아 사람의 힘으로 중국 및 아시아 지역의 유수한 대학을 지원하도록 하자는 취지로 홍콩에 사무실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사회에서 창립소장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들들, 손자들 다 한국에 있는데 당신도 이 먼 곳보다는 가까운 홍콩에 가서 있는 게 낫지 않겠냐며 제의를 받았지요.  허허허." 그래서 2001년에는 홍콩 침례대학에서 사무실을 열고 직원 1명과 일을 시작했는데, 지원 사업이 늘어나면서 뉴욕사무실에 있던 4명의 각 지역 프로그램 담당직원들이 홍콩으로 옮겨오게 되어 2004년8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중문대학으로 사무실을 넓혀서 옮겼다고 한다.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 연구소


주요 활동은 아시아 전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찬 교수들을 모아서 협의회도 조직하고, 기독교 대학 총장, 부총장들을 모아서 1주일간의수련회를 개최하며, 그 외에도 기독교 대학의 사명과 미래를 연구하는 모임들, 여성 교수, 여성학을 지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연세대, 이화여대, 숭실대를 비롯한 7곳의 대학과 주로 관계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동쪽에 대학은 많이 발전을 했지만, 그 외의 지역은 아직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다.  애덕재단(Amity Foundation)은 중국교회에서 시작된 재단인데, 교육훈련, 새마을 운동과 같은 지역사회 사업을 많이 벌이고 있다.  중국이 개방한 78년부터 애덕재단과 함께 주로 영어교육을 위주로 지원해 왔다.  최근에는 유수대학에서 기독교 관련학과를 설립하고 있어서 그 방면으로 많이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내륙에 있는 대학에는 교수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교수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교수들을 각 부문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낸다든지, 도서관 경영과 관련 직원들을 교육하는 등 눈에 보이는 건물을 지원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질적 향상을 위한 지원을 주로 하고 있다.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등 전쟁 때문에 가난해진 지역에 대한 후원도 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왕립 프놈펜 대학의 경우 재정이 열악해서 대학에 유리가 없고, 선생도 많이 부족해서 왕립이라는 칭호가 무색하더군요.  전쟁의 결과에 따라 중국어, 불어, 러시아어 등으로 강의를 하는 언어가 달라졌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이 영어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100평도 채 안되는 도서관에는 책도 부족하고, 컴퓨터는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나름대로 전쟁 중에 없어진 자료들을 보관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재 홍콩 이화여대 졸업생들이 캄보디아 교육사업에 써달라고 후원금을 희사해서 캄보디아에 지원을 하고, 이화여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미얀마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도 지원하고 있다는 미담도 들었다.



파란만장했던...

1931년 태어나신 교수님의 일생은 너무 드라마틱해서 마치 한편의 역사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만주로 피난을 갔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 심양 근처에 있는 탄광촌에서 생활을 했다.  중3때 해방이 되었고, 이북에서 중학교를 마쳤는데 6'25때 맥아더 장군이 평양을 탈환했을 때 아버지가 공산당에 잡혀서 순교했다고 한다.  "다른 목사님 4명과 함께 동아줄에 묶여 있는 시신을 대동강에서 찾았지요.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남한으로 내려와서 대한민국 해군 통신병으로 근무했어요.  그랬는데도 나보고 빨갱이 교수라고 합디다."년부터 이화여대 문리대학에서 신학, 철학 강의를 시작해서, 대학 교목 실장, 문리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1996년 은퇴를 하기까지 4년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장하다가 군사정권에 비판적이고, 반대를 표명하는 운동권 교수라고 해서 합동수사 본부에 연행 조사를 받고 해직을 당했던 것이다.

"4년간 해직생활이 괴롭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요.  학교를 떠나 있으면서 예수교 장로교회 목사안수를 받았고, 교회에서 목회도 했지요.  그래서 84년 복직 후에는 이대 교목도 하고, 장례식, 결혼예배 주례도 많이 했어요.  홍콩에서도 몇 번 결혼식 주례를 했는데, 그런 경사에 함께 할 수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한국에서는 YMCA활동을 많이 하였는데, 특히 1994년~1998년에는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YMCA회장을 역임, 세계 각국의 YMCA를 방문하고 많은 경험을 쌓았으며, 세계의 젊은이들을 만나는 귀중한 시간을 보냈다.



아름다운 부부


남을 돕는 일에 이렇게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일 때 혹여 부인의 반대는 없었을까.
보통의 경우 배우자가 봉사의 삶을 살게 되면 상대 배우자는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그 만큼의 빈 자리를 서운해 하게 마련 아닌가.

그러나 서교수님의 부인 역시 남편만큼이나 멋진 분이었다.  두 분은 서교수님이 미국에서 철학으로 석사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만났다고 한다.  부인 함선영여사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김활란 박사의 비서를 하다가 미국 감리교 장학생으로 유학을 하던 중 서교수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김옥길 총장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비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서교수와 함께 은퇴할 만큼 엘리트인 함여사는 '부창부수'라는 말처럼 서교수님의 봉사의 삶에 힘을 실어주며 그림자와도 같이 늘 함께 하였다. 1964년에 결혼했다고 하시니 금술 좋은 두 분의 행복한 금혼식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기원해 본다.

70세는 예부터 드물다고 하여, '고희(古稀)'라는 말로 표현 하였고, '마음대로 행동을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는' 많은 것을 초월하고, 고매한 경지라고 했다. 서교수님을 뵈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인생의 경험과 열심히 살아오신 날들이 말과 행동에 배어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푸르른 노송의 향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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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소식지의 표지에는 '교민소식'이라는 제호가 한문과 한글로 나란히 써 있다.
한문은 20여 년 전 여초 김응현 선생이 써주신 것 이고 한글은 바로 서교수님의 작품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글씨는 주인의 성품을 닮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이 없고 온화하면서도 정도(正道)의 품위가 느껴지는 글씨의 느낌을 그대로 마음에 담고 푸근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다.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 연구회에 홈페이지 주소는 하기참조.
http://www.asianinstitute.org       http://www.unitedboar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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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검도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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