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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가족이 만난 사람들] 홍콩한인회 잡지 교민소식에 연재했던 인터뷰 기사입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현경섭 한인회 고문을 만나서

01-05 13:37 | HIT : 347
홍콩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한인회 사무실에 가본 건 처음이었다.  상완 MTR역으로 나와 코스코 타워를 찾아갔다.  길치라고 늘 놀림 받는 나이지만 다행히도 헤매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회사가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약속시간 여섯 시에 딱 맞출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직원 분들이 아직까지도 일을 하고 있었다.  간단히 목례를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만나 뵙기로 한 현경섭 한인회 고문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죄송스러워서 오래 기다리셨냐고 여쭤보니 다른 일도 있고 하셔서 겸사겸사 볼 일을 보러 사무실에 오셨다고 한다.  숨을 돌리고, 인터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사실 참 막막했다.  홍콩 한인사회에서 들어 봄직한 직책은 다 맡아 보셨었고, 인생 내공이 뛰어난 분을 앞에 두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자, 한인회 유주현 과장님이 들어와 도와주었다.  "현고문님, 고문님들의 대표로 현고문님을 모셨으니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예전 홍콩 한인사회에 대한 이야기들과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주세요.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홍콩에서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도 오래 머물 사람이라서 그런지 예전 모습들이 궁금하더라구요."
                                                                                                                    
글 원정아

홍콩한인회 역사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홍콩 한인회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 보자.  1948년 정치적인상황 때문에 상해에서 홍콩으로 건너온 10여 가구의 교민들이 한인회를 설립했다.  5'16군사혁명 이후 1960년대에는 수출주도형성장을 추구해 온 한국 정부의 정책과 맞물려 홍콩에서 무역상사들의 해외지점 및 출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생돈, 마른살 오징어, 한천, 홍삼 등의 농산물을 위주로 수출에 힘쓰게 되었다.  1968-70년에는 주재상사들이 많이 진출하였고, 또 지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자영하는 분들도 늘어나서 한인회의 주축을 이루었으며 이 시기에 코리아센터도 세워졌다.  1970년대 초 코리아센터에는 19개 상사가 진출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더 활발한 한국교민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교민회 기구가 개편, 확대되면서 각종 한인 단체들이 생겨났다.    

1979년 홍콩교민 축구팀은 처음으로 대전에서 치뤄진제 60회 전국체전에 참가하여 해외동포팀 중 준우승을 차지했다.  1988년 문을 연 '홍콩 한국학교'가 1994년 현재 싸이완호에 위치한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였고, 이름도 '한국국제학교'로개명하였다.  1997년 말부터 시작된 IMF 경제파란으로 1998년 한해만 약 1,500명의 교민이 홍콩을 떠나는 험난한 시기도 지났으나, 다시 교민들이 서서히 증가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홍콩이민 1세대

"1962년, 한국에서 대학을 1년 마치고, 홍콩에 왔어요.  와서 몇 년 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공부를 마치고 다시 홍콩으로 다시 돌아온 게 1968년 11월이네요.  "한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홍콩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많으시네요?' 하고 여쭤보니, "그래서 그런지 여전에는 한국 식당에 가도 사람들이 한국말로 안 물어보고, 영어메뉴를 가져다주고 영어로 묻곤 했어요. 아마도 옷이나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한국 사람들은 검은색이나 회색 같은 어두운 단색 계통을 즐겨 입었는데, 나는 컬러가 들어간 밝은 색 옷을 즐겨 입곤 했거든요.  그런 부분은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라고 답하신다.  결혼만 한국에서 하고 바로 홍콩으로 와서 살림을 차렸어요. 아이들도 다 여기에서 컸고, 큰 아이는 홍콩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금융 쪽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작은 아이는 딸인데, 콜롬비아 대학에서 석사 마치고 홍콩에서 나이키 인터내셔널에 근무하고 있어요.  지금은 싱가폴에 파견근무 나가있고.."   가정과 사업이 다홍콩에 기반을 두고 있고, 홍콩에서 반평생을 보내신 분답게 전적이 화려하다.  

1970년 중반에는 토요학교 학원장, 전무이사, 부회장을 맡았고, 1985-87년에는 상공회장을, 1996-98년에는 한인회장을 역임하셨다.  지금은 한인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한다.


코리안 센터, 뭉치면 산다 ?

한국상품 직매장 설치 운영을 통한 동남아 수출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증대와 교민들의 경제 및 문화적 지위 향상과 국위 선양을 위한 목적으로 1969년 Connaught Road에(현 이화원위치)코리아 센터를 설치하고 운영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주홍콩 한국 총영사관, 코트라 무역전시관, 일반회사, 한인회, 한국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사는 아파트, 한인교회, 토요학교, 그리고 아가씨가 있는 한국 술집까지 한국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이 다 모여 있기도 해서, 정말 말 그래도 코리아 센터였다고 한다.  후에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였고, 1997년 홍콩 현지인에게 매각되었지만 창립 후 30년간 홍콩에 한국인 촌을 형성하고 한국인들의 생활근거지였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더 끈끈하게 정을 나눌 수 있었지.  매일 저녁에 19층에 올라가면 다들 모이는 분위기였고, 술을 주고받고 그렇게 지냈었지."

한인회의 가장 의미 깊었던 활동은 한국국제학교 설립

한국사람들은 유난한 교육열은 잘 알려져 있다.  현 고문님에게 한인회 활동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보람 있었던 일을 여쭤보았더니,"한국국제학교 설립"이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홍콩에 지사들이 생기고, 한국인들이 진출하자 대부분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게 되었다. "손상용씨가 한인회장을 할 때, 삼성, 한일합섬 등 홍콩에서 제일 규모가 컸던 3개 회사의 지점장들이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 그런데 돈이 없었으니까, 일단은 모금을 시작했지.  한인한국학교 건축설립 기구를 만들고, 토요학교 바자회도 하고, 토요학교 수업료 잉여금을 모으면서 기금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돈이 300만불 쯤 모였을 때 (1988년) Pok Fu Lam Road 서남쪽에 위치한 유치원 자리를 임대해서, 홍콩 한국학교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변기 파이프가 터져서 오물이 교실에 튀기도 하고 매우 열악했지요."  그러다가 1989년 홍콩정청 Sir David Ford가 재홍콩 한인 상공인들을 가든파티에 초청하여 홍콩의 중국 반환에 따른 설명 및 이에 대한 경제협조를 부탁했는데, 손한주 당시 한인회장이 참여하여 학교 신출부지를 할애해 주도록 요청을 했고, 이를 승낙 받았다.  토지는 확보하였는데, 건물을 지을 자금이 부족했다.  

"처음에 건설비가 미화 600만불 정도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었고,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한국 정부에서는 미심쩍어 하는거야.  그도 그럴 것이 5공때 LA 한 교포가 학교를 짓는다고 100만불을 받아갔는데, 사람은 사라지고 돈은 없어졌거든.  그래서 지원을 받기가 힘들었는데, 장규찬씨, 김재강씨 등이 국회 문교분과 위원을 찾아가 예산 할당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로비를 하였고, 모금을 하는 금액에 맞춰서 지원을 받기로 약속했어요.  실제로 학교가 생기는 가를 보기 위해서, 1불 기금이 모이면, 한국 정부에서도 1불을 지원해 주기로 한 거지."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힘이 모여 1994년 학교 준공식을 거행했으며, 세계 재외한국인 교민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국제학교를 세우는 위업을 달성했다.  현재 한국국제학교는 영어과정과 한국어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고, 중학교 과정까지 운영하고 있어 명실공히 국제학교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해봉OB팀을 아시나요? 

홍콩은 프로축구 리그가 3부로 나뉘어 있고, 프로팀만 해도 36개가 있다고 한다.  특히 1970년에서 1980년 중반까지는 홍콩 축구 전성기로 아시아 최초로 프로화되었는데, 이 때는 한국 축구 대표선수들이 홍콩에 진출하는 것이 꿈이었다.  

"한 때 손상용씨랑 몇 명이 주동이 되어서 해봉OB팀이라는 홍콩 프로축구팀을 인수했었어요.  그때는 세이코가 제일 강했는데, 이 팀은 1리그 12팀 중에서 꼴찌에서 헤맸었어.  그런데 우리가 인수해서 한국 선수들을 많이 기용하고, 3위까지 했었지.  그러니까 홍콩축구연맹에서 룰을 바꿔버려서 외국선수가 2명 이상 뛸 수 없게 해버렸어. 그래서 팔아버렸지."  이 때 꺽다리 선수 김재한, 명골키퍼 변호영, 아시아 최고 인기선수 이회택, 박이천, 박병철, 유건수, 이차만 선수 등이 활동하며 인기를 누렸다.  그래서 인지 한국사람으로 자랑스러웠던 때를 여쭤보니, 역시 축구랑 관계가 있었다.  "월드컵 축구 했을 때"라고 대답하신다. "월드컵 때 클럽하우스에 모여서 축구를 보곤 했는데, 그러면 홍콩 사람들도 같은 아시아 사람이라서 그런지 한국을 응원하더라구.  홍콩 사람들이 영국의 영향을 받아서 의외로 축구 수준이 높거든.  같이 앉아서 응원하면서 보는데 신이 났었지." 

전국체전 당시의 에피소드 등 옛날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는데, 아쉽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짧은 만남을 한인회와 교민들에게 당부의 말씀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나는 나름대로 한인회에 봉사도 하고, 기여도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젊은 세대들이 그 뒤를 이어서 잘해줬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크게 분쟁도 없고 다들 잘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한인사회에 기여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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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검도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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